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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좀비 영화를 볼 때마다 "또 뛰는 좀비네" 하는 생각부터 드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연상호 감독의 신작 <군체>는 처음부터 그 공식을 비틀었습니다. 좀비가 진화한다는 설정이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실제 과학 실험에 근거하고 있고, 그게 영화를 보는 내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제79회 칸영화제 공식 초청에 개봉 나흘 만에 100만 관객. 이유가 있었습니다.

 

집단지성 좀비, 어디서 왔나

제가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건 "도대체 좀비가 어떻게 진화한다는 건데?"였습니다. 막상 보고 나니 설정의 출발점이 꽤 단단했습니다.

영화는 폴리세팔로 황색 망사 점균(Physarum polycephalum)을 핵심 모델로 삼습니다. 여기서 점균이란 단세포 생물이면서도 군체처럼 행동하는 특이한 유기체로, 뇌도 신경계도 없이 스스로 최적화를 이뤄냅니다. 일본의 나카가키 토시유키 연구팀이 2000년에 진행한 미로 실험이 이를 증명했습니다. 미로의 시작과 끝에 먹이를 놓고 점균을 풀어두자, 점균은 미로의 모든 경로를 탐색한 뒤 비효율적인 경로를 스스로 제거하고 최단 경로만 남겼습니다(출처: Nature, Toshiyuki Nakagaki et al., 2000).

영화 속 감염체는 바로 이 점균의 원리를 인간의 몸속에 이식한 셈입니다. 균사체(菌絲體)란 균류가 뻗어내는 실 모양의 구조물인데, 영화에서는 감염자들 사이를 잇는 흰 실 형태로 시각화됩니다. 이 균사체를 통해 한 개체가 학습한 정보가 전체 군집으로 실시간 공유됩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이 장면을 처음 목격했을 때, "아, 이건 진짜 무섭게 만들려고 제대로 공부하고 만들었구나" 싶었습니다.

요약: 군체의 좀비 설정은 점균 실험이라는 실제 과학적 근거 위에 세워졌으며, 이것이 기존 좀비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출발점이다.

 

점균 실험이 만들어낸 공포의 구조

영화에서 제가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은 좀비 한 마리가 문을 머리로 들이받는 법을 터득하자마자, 건물 안의 다른 좀비들이 그걸 동시에 따라 하기 시작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처음엔 네 발로 기어 다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두 발로 걷고, 나중엔 사람과 사진을 구분하기까지 합니다. 이걸 영화 속 인물들은 "업데이트"라고 부릅니다.

이 설정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중앙 리더가 없다는 점입니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개별 구성원의 지능과 무관하게 집단 전체가 마치 하나의 뇌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개미 군집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개미 한 마리의 IQ는 형편없지만, 수십만 마리가 페로몬 신호를 주고받는 순간 군집 전체는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고 먹이를 운반하며 집을 짓습니다.

영화도 이 원리를 정확히 따라갑니다. 몇 마리를 쓰러뜨려도 네트워크 자체는 살아 있으니 전체 군집은 계속 진화합니다. 적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운영체제(OS)를 상대하는 거라는 표현이 딱 맞았습니다. 제 경험상 좀비 영화에서 이렇게 시스템을 상대한다는 감각을 준 작품은 처음이었습니다.

  • 네 발 보행 → 두 발 보행 → 인간·사진 구분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진화
  • 균사체를 통한 실시간 정보 공유로 개체가 아닌 군집 전체가 학습
  • 중앙 리더 없이 작동하는 집단지성 구조 — 일부 제거해도 전체는 멈추지 않음
  • 수직 구조의 봉쇄된 건물이라는 공간이 이 진화를 층마다 체감하게 설계됨
요약: 군체의 공포는 개별 좀비가 아니라 리더 없이도 진화하는 집단지성 네트워크 그 자체에서 나온다.

 

진화형 좀비 앞에서 살아남는 인간

사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좀비보다 사람 쪽이었습니다. 생명공학과 교수 권세정(전지현)이 다리가 불편한 현이를 망설임 없이 일으켜 세우는 장면. 속도가 생존의 전부인 상황에서 그 선택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합니다.

나중에 현이는 자신의 휠체어를 좀비를 유인하는 미끼로 내놓습니다. 몸도 불편한데 자기가 가진 유일한 이동 수단을 내어주는 겁니다. 연상호 감독이 이 캐릭터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게 뭔지 보였습니다. 생존에 최적화된 인간이 아니라, 옳다고 믿는 것을 밀고 나가는 인간입니다.

반면 악당 서영철의 동기는 솔직히 끝까지 납득이 잘 안 됐습니다. 연구를 빼앗겼다는 분노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라는 명분으로 비약하는 과정이 너무 빠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빌런 유형은 한국 영화에서 꽤 자주 봤기 때문에, 이 부분만큼은 설정의 신선함이 캐릭터를 따라가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아쉬운 지점은 아쉬운 지점으로 남겨두는 게 맞습니다.

요약: 생존 최적화보다 신념을 택하는 인간 캐릭터가 진화형 좀비와 대비를 이루며 영화의 감정선을 만든다.

 

앤트밀 현상과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

영화 후반에 나오는 앤트밀(Ant Mill) 이야기가 제게는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앤트밀이란 선두 개미가 자기 페로몬 흔적과 다시 만나면 무한 루프에 빠지는 현상으로, 탈출 신호를 줄 개체가 없으면 개미들은 지쳐 죽을 때까지 같은 원을 계속 돕니다(출처: National Geographic, Ant Death Spiral). 뇌도 있고 판단력도 있는 존재들이 시스템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저도 회사에서 AI 도구와 알고리즘에 점점 더 많은 결정을 맡기는 세대입니다. 더 빠르고 더 효율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는 점점 더 흐릿해집니다. 영화가 이 비유를 입으로 직접 설명해 버리는 바람에 설교처럼 느껴진다는 점은 솔직히 거슬렸습니다. 관객이 느끼게 놔뒀으면 훨씬 강렬했을 텐데 싶었거든요.

그럼에도 이 메시지 자체는 유효합니다. 군체(Colony)라는 단어가 좀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독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부산행이 달리는 공포로 속도감을 줬다면, 군체는 진화하는 공포로 사유를 촉발합니다. 좀비 영화가 이렇게 머리를 쓰게 만든 건 제가 본 한국 영화 중에서 처음이었습니다.

요약: 앤트밀 현상을 통한 AI 사회 비유는 유효하지만, 직접 설명 방식이 여운을 반감시킨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주 묻는 질문

Q. 군체 좀비가 진화한다는 게 그냥 설정인가요, 실제 근거가 있나요?

A. 실제 과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나카가키 토시유키 연구팀이 2000년에 발표한 점균 미로 실험이 핵심 모델입니다. 뇌와 신경계 없이 최단 경로를 스스로 찾아내는 점균의 원리를 균사체 네트워크를 통한 집단지성으로 변환한 것이 이 영화의 설정입니다. 허황된 SF가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다릅니다.

 

Q. 부산행이랑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재밌나요?

A. 장르적 쾌감을 원한다면 부산행 쪽이 더 즉각적입니다. 반면 군체는 속도감보다 공포의 개념 자체를 새로 제시하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보고 나서 생각이 남는 영화를 원한다면 군체가 더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Q. 중반부가 설명이 너무 많다는 평이 있던데 실제로 그런가요?

A. 제가 직접 보면서도 그 부분이 느껴졌습니다. 집단지성과 균사체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데 시간을 꽤 씁니다. 덕분에 설정 이해는 쉬워지지만, 그만큼 공포의 긴장감이 중반에 한 번 내려앉는 구간이 존재합니다. 2막 초반의 흐름이 다소 설명적이라는 평은 틀리지 않습니다.

 

Q. 칸영화제 초청이 실제로 의미 있는 건가요?

A. 군체가 초청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은 장르 영화를 위한 섹션으로, 예술성보다는 장르적 완성도와 스펙터클을 보는 부문입니다. 한국 좀비 영화가 여기에 초청된 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다만 경쟁 부문이 아니므로 수상과는 별개로 봐야 합니다.

 

결론

군체를 보고 나서 제가 내린 판단은 이렇습니다. 좀비 영화로서의 완성도는 높고, 설정의 근거는 탄탄하며, 배우들은 전원 제 몫 이상을 했습니다. 다만 악당의 서사가 얇고, 하고 싶은 말을 지나치게 직접 설명하는 습관이 여운을 깎아먹습니다. 부산행이 처음 봤을 때의 충격과 동급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한국 좀비 장르의 방향을 하나 더 열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속도에서 진화로, 공포의 문법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집이 아니라 극장의 큰 스크린에서 보길 권합니다. 좀비 영화가 이렇게까지 머리를 쓰게 만드는 경험은 생각보다 드물거든요.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Y6RI7hdc2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