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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들었을 때 또 다른 재난 블록버스터라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끝나고 나서 리모컨을 쥔 채로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그때서야 제가 얼마나 틀렸는지를 깨달았습니다. 2009년작 '더 로드'는 특수효과 한 컷 없이 아버지와 아들의 걸음만으로 두 시간을 채운 영화입니다. 보고 나면 이상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드는데, 그게 왜인지 글로 한번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생존: 끝난 세상에서 걷는다는 것

'더 로드'는 포스트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장르입니다. 여기서 포스트아포칼립스란 문명이 붕괴한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살아남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서사 장르를 말합니다. 이 장르에서 흔히 나오는 외계인도, 좀비도, 핵전쟁의 직접적인 묘사도 없습니다. 원인이 뭔지 영화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게 오히려 더 무섭습니다.

배경은 나무가 전부 죽은 회색 대륙입니다. 해는 뜨는데 온기가 없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먹을 것을 두고 서로를 죽이거나, 더 나아가 인간을 식량으로 삼는 수준에 이르러 있습니다. 비고 모텐슨이 연기하는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남쪽을 향해 걸어갑니다. 바다에 닿으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반쯤 포기한 기대를 안고서요.

제가 이 영화에서 제일 먼저 압도된 건 총격전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밀어가는 녹슨 푸시카트, 그리고 총알 두 발 남은 권총 한 자루가 전 재산이라는 설정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전부 적으로 간주하고 먼저 숨는 게 기본값입니다. 그 전제가 맞는 세상이라는 게 이 영화의 진짜 비극입니다. 어느 농장에서 사냥꾼 무리와 마주쳐 총을 뽑고 도망치고, 한 가정집 지하실에서는 사람들을 가축처럼 가두어 놓은 참상을 목격합니다. 그 장면은 지금 떠올려도 애가 탑니다.

  • 원인 불명의 문명 붕괴 — 설명 없음이 오히려 공포를 키운다
  • 남쪽을 향한 도보 이동 — 목적지가 희망인지 습관인지 모를 걸음
  • 인육 포식자 집단 — 생존 본능이 윤리를 완전히 대체한 세계
  • 총알 두 발 — 탈출이 아닌 마지막 선택지로서의 무기
 

부성애: "우리는 아직 좋은 놈들이죠?"

아이가 이 한 마디를 던집니다. "우리는 아직 좋은 놈들이죠?" 저는 이 문장이 이 영화의 심장이라고 봅니다. 아무 규칙도 남지 않은 세상에서 굶지 않는 방법은 남을 먼저 잡는 것뿐인데, 그마저 하지 않고 걸어가는 이유가 바로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라는 거잖아요. 이 대사 하나가 두 시간의 영화를 압축합니다.

아이를 키워보고 나서 이 영화를 다시 보니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개봉했던 2009년에 서른 즈음이었다면 아마 어둡고 지루하다고 한마디 하고 넘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쥐여줄 수 있는 것이 '좋은 사람으로 남는다'는 원칙 하나뿐인 세상을 이제는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상상이 너무 선명해서 화면을 보는 내내 속이 조여들었습니다.

비고 모텐슨의 연기는 과하지 않아서 더 무겁습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상 아버지 캐릭터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따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 안에서 사건과 인물이 연결되는 방식을 뜻하는데,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세상을 구하지 않습니다. 아들 곁에서 버티다가 떠납니다.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여기까지였다는 걸 아이보다 먼저 아는 사람이라 더 씁쓸합니다. 이 지점이 일반적인 재난 영화 주인공과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입니다.

 

결말: 희망이라기엔 너무 작아서 믿을 만했다

결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남쪽 바다까지 닿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도착해도 세상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짐을 훔쳐 간 무리를 쫓아 물건을 되찾고 돌아오는 길에 화살에 맞아 크게 다치고, 그 상처가 화근이 되어 아들 곁에서 눈을 감습니다. 뒤를 따라오던 한 가족이 아들을 거두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이 결말을 두고 "너무 자비롭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두 시간 내내 잿빛으로 관객을 붙들어 막았던 영화가 마지막 십 분에서 다정한 가족을 딱 하나 놓아준다는 거지요. 원작 소설은 코맥 매카시 특유의 방식대로 희망과 불안을 반반으로 놓고 뚝 끊는 반면, 영화는 조금 더 안도할 여지를 줍니다. 저는 이 차이를 처음엔 아쉬움으로 받아들였는데, 결국 지금은 다른 쪽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희망이라기엔 너무 작아서 오히려 믿을 만했다는 쪽으로요. 코맥 매카시는 퓰리처상(출처: The Pulitzer Prizes)을 수상한 동명 소설의 원작자인데, 소설과 영화의 온도 차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소설을 먼저 읽은 분들이라면 영화 결말이 더 순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온도 차 덕분에 영화와 소설 각각을 별개의 경험으로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비판한다고 했는데 결국 소설도 다시 살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아내 서사와 영화의 한계: 건진 영화, 열 점 만점에 일곱 점

이 영화에서 제일 아쉬웠던 부분은 아내 서사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이와 함께 끝을 가장 먼저 선택해야 했던 사람은 주인공도 아들도 아닌 바로 그 여자인데, 영화는 그녀를 그리움의 회상 컷으로만 씁니다. 회상이 나올 때마다 쟁점은 사랑이 아니라 선택이었는데, 그 지점을 끝내 건드리지 않고 넘어갑니다. 영화가 감성 여운(emotional residue)을 쌓는 방식으로 그녀를 활용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여기서 감성 여운이란 특정 장면이나 인물이 장면이 끝난 뒤에도 관객 감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효과를 말합니다. 소설에서는 이 자리가 훨씬 고통스럽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명작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건진 영화'로 남깁니다. 열 점 만점에 일곱 점. 요즘 재난 영화들이 시각 효과 위주로 소비되고 사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지치고 소박한 필름이 오히려 오래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영화 비평 매체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도 이 작품의 신선도 점수는 74%로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립니다(출처: Rotten Tomatoes). 이처럼 관객 반응이 갈리는 영화일수록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제 경험상 느낍니다.

밥 먹으면서 보시면 안 됩니다. 제 경우엔 국이 식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무거워도 괜찮은 날 밤, 조용히 한 번 앉아 보기를 권합니다. 무서운 존재가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고, 지켜야 할 대상이 이념이 아니라 내 아이라는 것을 이렇게 끝까지 밀어붙인 재난 영화를 저는 처음 봤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더 로드, 원작 소설이랑 영화 중에 뭘 먼저 봐야 하나요?

A. 영화를 먼저 보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순서보다 둘 다 경험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영화는 시각적 잿빛 분위기가 압도적이고, 소설은 아내 서사와 결말의 온도가 영화보다 훨씬 냉정합니다. 각각이 별개의 경험이라, 어느 쪽이 먼저여도 나중에 본 쪽이 새롭게 읽힙니다.

 

Q. 더 로드 너무 우울하지 않나요? 끝까지 볼 수 있을까요?

A. 지루하고 어둡다고 중간에 멈추는 분들도 충분히 있습니다. 실제로 사건이 거의 없고 대사도 짧게 잘립니다. 다만 제 경험상 50분을 버티면 그 이후로는 화면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재난 스펙터클을 기대하고 보면 실망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집중하고 보면 끝나고 한참을 앉아 있게 됩니다.

 

Q. 더 로드 결말이 열린 결말인가요, 닫힌 결말인가요?

A. 영화판은 닫힌 결말에 가깝습니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새 가족을 만나며 끝납니다. 반면 소설은 여운과 불안을 동시에 남기는 방식이라 열린 결말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영화 결말이 지나치게 정리됐다는 의견도 있고, 그게 오히려 작은 희망으로 느껴진다는 의견도 있어서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Q. 더 로드 아이에게 보여줘도 괜찮은가요?

A. 국내 기준 15세 이상 관람가입니다. 직접적인 폭력 장면이 일부 있고, 인간을 가축처럼 가두는 장면은 심리적 충격이 클 수 있습니다. 중학생 이상이라도 부모와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누는 방식을 저는 권합니다. 혼자 감당하기에 무게감이 있는 영화입니다.

 

결론

'더 로드'는 재난 영화의 탈을 쓴 부성 영화입니다. 아내 서사의 미완성과 결말의 온기가 과하다는 아쉬움이 있어도,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오래 남습니다. 굶지 않는 방법이 남을 잡는 것뿐인 세상에서도 좋은 사람으로 걷겠다는 선택, 그게 이 영화의 전부이고 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마음이 무거워도 괜찮은 날 밤 한 번 꺼내 보시길 권합니다. 끝나고 나면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하고 싶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아 있는 온기가 아직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가 주는 위로라고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N5zbVjKNnh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