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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를 보고 나서 정작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었다고 느낀 적 있으십니까. 며칠 전 저녁, 밥을 먹고 소파에 앉았다가 우연히 틀어버린 영화 한 편이 오십 넘은 저를 그런 생각 속에 오래 붙잡아 뒀습니다. 2009년 개봉작 '더 홀(The Hole)'이었습니다.

 

지하실 바닥의 구멍, 그 줄거리를 따라가다

이야기는 한적한 마을로 이사 온 가족에서 시작됩니다. 친구들과 멀어진 것에 화가 난 큰아들 데인, 그 화풀이를 고스란히 받는 동생 루카스, 그리고 두 아이를 홀로 건사하는 엄마. 여기에 이사 온 집 옆에 사는 소녀 줄리까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루카스가 지하실 바닥에서 뚜껑이 달린 구멍을 발견합니다. 낚싯줄을 내려봐도 바닥이 닿지 않고,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해 봐도 어둠만 가득합니다. 이 장치는 공포 영화의 맥거핀(MacGuffin)과는 다릅니다. 맥거핀이란 사건을 촉발시키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소품을 뜻하는데, 더 홀의 구멍은 그 자체가 이야기의 핵심 은유로 기능합니다. 구멍은 등장인물 각자가 억눌러온 심리적 트라우마(psychological trauma)를 끄집어내는 장치입니다. 여기서 트라우마란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현재의 감정과 행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상처를 가리킵니다.

제가 이 설정에 끌렸던 건, 직접 겪어본 이사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살면서 여러 번 이사를 다녔는데, 오래된 집의 창고를 열면 정체 모를 냄새와 함께 이전 세입자의 흔적이 나오곤 했습니다. 벽지 뒤에서 낙서가 나오고, 바닥에 못이 박혀 있던 자국이 남아 있고. 그때마다 아내가 제 옷을 잡아당기며 빨리 닫으라고 했던 게 생각났습니다. 그 감각이 화면 속 구멍과 겹쳐 보였습니다.

  • 데인의 공포: 어린 시절 가정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의 기억
  • 루카스의 공포: 광대 공포증(coulrophobia), 침대 위에 놓인 광대 인형으로 구체화
  • 줄리의 공포: 어린 시절 사고로 잃은 친구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
 

공포 설정은 좋았다, 작동 방식이 흥미롭다

제가 직접 봐보니, 이 영화의 공포 설정 자체는 생각보다 영리했습니다. 구멍이 나타나는 환영(hallucination)의 방식이 캐릭터마다 달랐습니다. 환영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지각하는 현상으로, 심리적 억압이 임계점을 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카스 앞에는 광대 인형이 스스로 움직이고, 줄리 앞에는 죽은 친구의 모습이, 데인 앞에는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이 구조는 투사(projection)의 메커니즘과 닮아 있습니다. 투사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기억을 외부 대상에 덮어씌우는 심리 방어 기제입니다. 구멍은 그 투사의 스크린 역할을 합니다. 공포 영화의 공식적 용어로는 딥 드레드(deep dread), 즉 원인을 명확히 특정하기 어렵지만 존재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막연한 공포감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미국심리학회(APA)의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 형성된 공포 반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유사한 자극에 반응한다고 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공포를 단순히 시각적 충격으로 처리하지 않고, 캐릭터의 내면과 연결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기획 의도만큼은 좋았다고 봅니다.

줄리 역을 맡은 헤일리 베넷(Haley Bennett)의 풋풋한 연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배우를 처음 접하시는 분이라면, 당시 신인에 가까웠던 시절의 연기를 눈여겨볼 만합니다.

 

아쉬운 점들, 솔직히 말하자면

감독이 조 단테(Joe Dante)라는 걸 알고 나서는 솔직히 실망이 더 컸습니다. 1984년 그레믈린스(Gremlins)로 공포와 유머를 절묘하게 버무렸던 사람이, 정작 이 작품에서는 공포를 너무 납작하게 눌러놨습니다. 3D 가족용 극장 개봉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작품이니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지만, 결과적으로 광대 인형, 갑자기 나타나는 소녀, 물속으로 끌려가는 장면처럼 공포 영화 몇 편만 봐도 낯익은 장면들이 나열됩니다.

가장 아쉬운 건 결말 처리 방식입니다. 구멍이 각자의 공포를 비춘다는 설정은 좋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을 이겨냈더니 구멍이 사라진다'는 해결 방식은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를 거치며 겪는 내면적 변화 과정이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쉽게 말해 자기 계발서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의 기분이었습니다. 데인의 아버지 폭력이라는 묵직한 소재를 꺼내놓고도, 그 상처가 어떻게 쌓이고 지금까지 어떻게 이 가족에게 영향을 미쳐왔는지는 거의 파고들지 않습니다. 소재만 빌려 쓰고 무게는 책임지지 않은 셈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영화는 기억에 오래 남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아야 진짜 잘 만든 공포 영화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더 홀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영화 장르 분류상 이 작품은 다크 판타지 스릴러(dark fantasy thriller)에 해당합니다. 다크 판타지 스릴러란 현실을 배경으로 하면서 초자연적 요소를 통해 심리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르를 가리킵니다. 그 정의에는 충실했지만, 깊이가 아쉬웠습니다.

리뷰 정보를 찾아보다 헤일리 베넷의 이름이 잘못 표기된 자료들을 심심찮게 만났는데, 영화를 소개하는 글이라면 최소한 출연 배우의 이름 정도는 확인하는 편이 맞지 않겠습니까. 배우 이름은 Haley Bennett이며, IMDB 공식 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IMDB, The Hole(2009)).

 

자주 묻는 질문

Q. 더 홀(2009) 무섭나요? 아이랑 같이 봐도 되나요?

A. 제가 직접 봐보니 자극적인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가정 폭력이라는 소재가 등장하지만 묘사가 절제되어 있고, 피나 잔인한 장면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라면 가족이 함께 봐도 무리 없는 수위입니다. 다만 광대 공포증이 있는 분이라면 광대 인형 장면이 조금 불편할 수 있습니다.

 

Q. 더 홀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A. 데인, 루카스, 줄리 세 사람이 각자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과 정면으로 맞서고 그것을 극복하자, 구멍이 사라지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데인은 어린 시절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의 환영을, 루카스는 광대를, 줄리는 사고로 잃은 친구에 대한 죄책감을 각각 이겨냅니다. 제가 보기엔 해결이 다소 단순하게 처리된 편입니다.

 

Q. 줄리 역 배우가 누구예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A. 줄리 역은 헤일리 베넷(Haley Bennett)이 맡았습니다. 이 작품이 나왔을 당시는 신인에 가까웠고, 이후 '매그니피센트 7', '걸 온 더 트레인' 등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더 홀에서의 풋풋한 연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줍니다.

 

Q. 감독 조 단테가 왜 이렇게 순한 공포 영화를 만들었나요?

A. 더 홀은 원래 3D 가족 관객을 겨냥해 기획된 작품입니다. 그레믈린스로 유명한 조 단테 감독이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전 연령대가 즐길 수 있는 다크 판타지 스릴러를 목표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공포의 날카로움보다 메시지와 분위기 쪽에 무게를 더 실은 셈인데, 제 경험상 이런 선택이 성인 관객에겐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결론

오십을 넘기고 나서야 이런 영화를 보며 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젊을 때는 공포 영화에서 얼마나 무서운지를 먼저 따졌는데, 이제는 무엇을 무서워하는 사람들 이야기인지를 먼저 보게 됩니다. 더 홀은 그 질문을 꺼내드는 영화로서는 충분히 볼 만합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잘 만든 영화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설정은 영리하지만 결말이 단순하고, 무거운 소재를 꺼내놓고도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저녁에 보기엔 무난하고, 영화 보고 나서 "나는 뭘 제일 무서워하지?"라는 질문 하나 남겨두기에는 괜찮은 선택입니다. 혼자 보며 깊이 생각할 거리를 원하신다면, 기대를 조금 낮추고 보시길 권합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epfXRiV0i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