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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좀비영화 〈아이 엠 어 히어로〉는 2016년 세계 3대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5관왕을 거머쥔 작품입니다. 어젯밤 유튜브에서 우연히 접했는데,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좀비물인데 좀비가 제일 무섭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평범한 주인공 — 영웅이 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주인공 스즈키 히데오는 15년 전 신인상을 받고도 여전히 어시스턴트 만화가로 사는 남자입니다. 연인 집에 얹혀살고, 총을 허가받아 들고 다니면서도 정작 한 발도 못 쏘는 사내. 영화 제목이 "나는 히어로다"인데, 이건 영웅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웅이 될 시절을 놓쳐버린 사람의 변명처럼 느껴졌습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간 히데오는 감염자가 되어버린 여자친구를 마주합니다. 도망치다가 우발적으로 범인 취급을 받고, 다시 직장으로 향하니 동료들은 이미 예전의 동료가 아닙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봤을 때 웃음이 먼저 나왔습니다. 30년 가까이 조직에서 일해 본 사람으로서, 위기가 와도 사람들은 여전히 출근하고 여전히 눈치를 보는 그 광경이 너무나 낯익었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가 퍼져도 회사는 회사라는 것, 이게 이 영화가 가장 잘 잡아낸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여기서 좀비 아포칼립스(zombie apocalypse), 즉 기존 사회 질서가 완전히 붕괴된 재난 세계관을 배경으로 깔면서도, 중심에는 세상이 무너지고 나서야 비로소 총을 들어 올리는 평범한 인간을 세워 둡니다. 그 씁쓸함이 제 취향이었습니다.
감염 설정 — 좀비들이 과거 기억 속에 산다는 것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남은 설정은 잔혹한 액션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감염자들이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하던 행동만 반복한다는 설정이었습니다. 쇼핑몰 광장에서 높이뛰기를 반복하는 체육특기생 좀비가 나중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전개, 이건 다른 좀비물에서 본 적이 없는 상상력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하나즈와 케nтро의 동명 만화로, 2009년부터 연재가 시작됐습니다. 국내 좀비 블록버스터인 부산행(2016)과 개봉 연도는 같지만, 원작 만화의 연재 시작은 훨씬 앞섭니다. 감염 메커니즘(infection mechanism), 즉 바이러스가 숙주에게 퍼지면서 인간의 행동 양식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다루는 방식에서 이 작품만의 독자적인 관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소녀 히로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염자에게 물렸지만 좀비로 완전히 전환되지 않은 경계적 존재, 이른바 하이브리드 감염자(hybrid infectee)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과 좀비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는 상태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은 나이를 먹어봐야 안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히로미가 자신의 비밀을 끝까지 숨기다 무너지는 그 표정에서, 살다 보면 말하면 잃는 것들이 생긴다는 어떤 진실이 겹쳐 보였습니다.
- 감염자는 죽기 전 직업·습관·기억을 그대로 반복한다 — 체육특기생, 경비원 등
- 히로미는 하이브리드 감염자로, 완전 전환 없이 괴력을 발휘하는 특수한 존재다
- 소리에 민감한 감염자의 약점은 생존자들이 옥상 베이스캠프를 유지하는 핵심 전략이다
부산행 비교 — 선배한테 "후배 닮았네" 하는 격
〈아이 엠 어 히어로〉 관련 리뷰를 몇 개 읽어봤는데, 거의 예외 없이 부산행 비교부터 시작하더군요. "일본판 부산행", "잔혹 버전 부산행", 심지어 "원조"라는 표현까지. 솔직히 이건 좀 억울하다고 봅니다. 두 영화 모두 2016년 개봉이지만 원작 만화 〈아이 엠 어 히어로〉의 연재 시작은 2009년입니다. 연상호 감독이 이 만화를 참고했다는 말이 정설처럼 돌고 있는데, 순서가 거꾸로라는 뜻입니다.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면에서도 두 영화는 결이 다릅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인물을 이끌어 가느냐를 의미하는데, 부산행은 아버지가 딸을 지키며 성장하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에 가깝습니다. 반면 〈아이 엠 어 히어로〉는 세상이 무너져도 여전히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히데오를 중심에 세웁니다. 히데오가 끝까지 "영웅"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으로 남는다는 것, 그 결말의 고독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두 편을 이어서 본 경험상, 재미로만 따지면 부산행이 이깁니다. 이건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산행이 잘 만든 오락영화라면, 〈아이 엠 어 히어로〉는 만화가의 씁쓸한 자화상에 좀비를 입힌 영화입니다. 잣대가 다른 두 작품을 같은 선 위에 놓고 우열을 가리는 건 처음부터 비교 방식 자체가 어긋난 것이라고 봅니다. 참고로 본 영화는 시체스 영화제를 포함한 세계 3대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수상 이력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아낀 한 발 — 결말이 남긴 것
후지산 기슭의 쇼핑몰 옥상에서 생존자들이 지내는 장면부터 이야기는 좀비물이 아니라 조직 드라마처럼 흘러갑니다. 식량이 떨어지자 세력 싸움이 벌어지고, 통제실에 숨어든 누군가가 복수를 위해 의도적으로 감염자를 불러들입니다. 제 경험상 이 장면이 좀비보다 훨씬 무서웠습니다. 오십 넘어 조직 생활을 돌아보면,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빠르게 갈라지는 걸 직접 겪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걸 좀비 세계관 안에서 아주 착실하게 보여줍니다.
결말에서 히데오는 총알을 마지막 한 발까지 아껴가며 살아남고, 아울렛을 빠져나옵니다. 제목이 〈히어로〉라 영웅적 승리를 기대했는데, 남은 것은 승리보다 고독에 가까운 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말이 좋았습니다. 아껴 쓴 것만 마지막에 남는다는 것, 이 말을 젊을 땐 잔소리로 들었는데 지금은 진심으로 느낍니다.
영화적 완성도를 객관적으로 보자면 대작은 아닙니다. 잔혹 액션(gore action), 즉 과도한 신체 훼손을 묘사하는 장면이 반복되자 긴장감보다 마비감이 먼저 왔고, 히로미라는 하이브리드 감염자 캐릭터는 후반부에 이르러 이야기의 심장에서 짐짝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작가가 아까운 소재를 그냥 세워 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공포는 신선할 때 무서운 것이지, 양으로 눌러앉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영화는 스스로 증명해 버렸습니다. 좀비 장르에 대한 학술적 분석을 더 보고 싶으신 분께는 이 분야를 꾸준히 다뤄온 한국영화학회의 자료를 참고해 보시길 권합니다(출처: 한국영화학회).
자주 묻는 질문
Q. 아이 엠 어 히어로, 부산행이랑 어떤 게 달라요?
A. 제가 두 편을 이어서 본 경험상, 재미와 완성도는 부산행이 앞섭니다. 그러나 〈아이 엠 어 히어로〉는 영웅이 되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 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소심하게 살아남는 이야기입니다. 부산행이 오락영화라면 이 작품은 자조적인 자화상에 가깝습니다. 같은 잣대로 비교하기보다는 다른 결의 영화로 보는 쪽이 맞다고 봅니다.
Q. 좀비물 잘 못 보는데 이 영화 봐도 될까요?
A. 잔혹 액션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기 때문에 피나 신체 훼손 묘사에 민감하신 분께는 솔직히 권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공포보다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이라면, 전반부만으로도 충분히 볼 만한 인간 드라마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소녀 히로미는 왜 좀비가 안 되나요?
A. 영화 안에서 명확한 과학적 설명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히로미는 감염자에게 물렸지만 완전 전환 없이 인간과 좀비 사이 경계에 머무르는 하이브리드 감염자로 묘사됩니다. 원작 만화에서도 이 설정은 미스터리로 남겨 두는 편인데, 그 모호함이 오히려 캐릭터의 매력이었다고 봅니다.
Q. 원작 만화랑 영화랑 많이 다른가요?
A. 원작 만화는 2009년부터 연재를 시작해 영화보다 훨씬 방대한 분량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영화는 원작의 초반부와 쇼핑몰 편을 중심으로 압축한 구성이라, 히데오의 내면 갈등이나 히로미의 변화 과정이 원작에 비해 얕게 다뤄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원작 만화를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결론
별 다섯 개 주기엔 부족하지만, 별 세 개 반은 아깝지 않다는 게 제 최종 판단입니다. 대작이 아니라는 건 인정합니다. 잔혹 액션의 반복, 히로미 캐릭터의 후반부 방치, 어수선한 연출 — 이 세 가지는 분명한 약점입니다.
그러나 좀비들이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 하던 행동만 반복한다는 설정, 그리고 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영웅이 되지 못하는 평범한 남자가 아낀 총알 한 발로 살아남는 결말, 이 두 가지는 오래 남습니다. 좀비물을 잘 안 보시는 분이라도, 공포가 아니라 사람이 궁금하신 분이라면 한 편 권해드릴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