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5년을 창고에 묵혀뒀다가 나온 영화라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며 극장에 들어갔는데, 막상 불이 켜지고 나서는 발이 잘 안 떨어졌습니다. 이지원 감독의 신작 <비광>은 묵직한 가족 연대기이자, 잘 만들었지만 아쉬움도 선명한 영화입니다. 캐스팅, 연출, 완성도 세 가지로 나눠서 제가 본 그대로 짚어보겠습니다.

 

SSS급 캐스팅이 실제로 작동하는가

마누라가 "'미스백' 감독 신작이 9월에 개봉했다더라"라고 했을 때, 저는 배우 라인업부터 검색했습니다. 류승룡, 하지원, 김시아, 김해숙, 김선영, 김영민. 이름을 보고 나서는 두말없이 지갑을 열었습니다.

류승룡이 연기한 황중구는 한때 KBO 리그 4번 타자였다가 36연패 팀의 선수로 추락한 인물입니다. 여기서 4번 타자란 팀에서 가장 강한 타격력을 갖춘 핵심 타자를 뜻하는데, 그 자리에서 밀려난 중구의 초라함을 류승룡은 과잉 없이 담아냈습니다. 자칫 신파로 흘러갈 장면에서 한 발 물러설 줄 아는 배우라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습니다.

하지원이 연기한 전 부인 남미는 화려했던 시절이 다 벗겨진 인물입니다. 담배를 피우고 욕을 내뱉는 파격적인 외형 변신은 준비가 됐는데, 정작 감정의 결이 그 파격을 못 따라가는 순간들이 보였습니다. 감독 본인도 인터뷰에서 하지원의 욕설 연기 점수를 20점이라고 언급했으니, 그 아쉬움을 제가 느낀 게 혼자만의 감상은 아닌 모양입니다.

김시아는 이 영화에서 사실상 중심을 들고 있습니다. '미쓰백' 때도 인상적이었지만, 이번엔 무게가 달랐습니다. 중학생 동주 역할로 영화 전체의 감정선을 끌고 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명품 조연진이 주연의 허점을 채워주는 구조가 작동하는 영화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심에서 김시아가 가장 단단했습니다.

  • 류승룡 — 몰락한 남자의 초라함, 과잉 없이 설득력 있게 전달
  • 하지원 — 외형 변신은 성공, 감정의 질감은 아쉬운 지점 존재
  • 김시아 — 영화 전체 감정선의 실질적 무게중심
  • 김해숙·김선영·김영민 — 등장 즉시 화면이 단단해지는 조연진
요약: 캐스팅 자체는 흠잡기 어렵지만, 하지원의 감정 밀도만큼은 기대치에 살짝 못 미쳤습니다.

 

이지원 감독의 연출, 무엇이 달라졌나

이지원 감독은 2018년작 '미쓰백'으로 평단과 관객을 동시에 사로잡았습니다. 그 영화의 힘은 단순함에 있었습니다. 학대받는 아이와 그를 외면하지 못하는 어른, 이 두 축만으로 관객을 끝까지 끌고 갔습니다. 제가 그 영화를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감독이 설명을 자제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비광>은 그 자제력이 흔들립니다. 언론의 선정성, 권력의 암투, 청소년 자살 문제, 가족의 결핍과 재결합. 하나만으로도 두 시간짜리 영화를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재료들을 한 솥에 다 넣었습니다. 장르적으로 보면 이건 누아르(noir)라기보다는 가족 멜로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누아르란 범죄와 비도덕적 세계를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숙명을 그리는 장르를 뜻하는데, <비광>에서 그 숙명적 어둠은 오히려 희석되어 있습니다.

제가 가장 못 견딘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영화 제목 '비광'이 상징하는 바, 즉 혼자선 보잘것없지만 함께일 때 빛을 낸다는 의미를 감독이 대사로 직접 설명해버립니다. 서브텍스트(subtext)란 대사 뒤에 숨어 있어 관객이 스스로 읽어내는 맥락과 감정을 뜻하는데, 이 장면에서 감독은 그 여백을 직접 지워버렸습니다. 여운이 남을 자리가 없어진 거죠.

한 영화 평론 매체에서는 이 영화를 두고 "비극도, 상징도, 감정도 너무 힘을 줬다"고 평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힘을 조금만 뺐다면 훨씬 더 아팠을 영화입니다. 잘 그린 벽화 앞에 서 있는데 손을 대면 차가운 느낌, 이지원 감독의 전작을 기억하는 사람일수록 그 온도 차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요약: '미쓰백'의 단순한 구조적 힘을 키우려다 오히려 분산시킨 연출, 상징을 대사로 풀어버리는 과잉 설명이 아쉬움의 핵심입니다.

 

5년 묵힌 창고 영화, 완성도는 어느 수준인가

<비광>이 2021년에 촬영을 완료하고 5년이 지나 개봉한 창고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솔직히 걱정했습니다. 오래 묵혔다는 건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요. 뚜껑을 열어보니 그 걱정이 완전히 기우는 아니었습니다. 일부 대사와 분위기가 2025년 현재의 감각과 미세하게 어긋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배급사와 제작사 간의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사정이 스크린 위의 아쉬움까지 다 설명해주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완성도 측면에서 이 영화를 낮게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본 것은 109분짜리 15세 관람가 영화였는데, 이 러닝타임 안에 8년짜리 가족 서사를 꾹꾹 눌러 담은 밀도만큼은 인정해야 합니다. 아이를 혈연이 아닌 선택으로 지키는 관계라는 시선, 그 진심은 화면에서 내내 읽혔습니다.

다른 매체에서는 "완성도는 높은데 극장에 가야 할 이유가 안 떠오른다"는 평이 나왔고, 저는 그 문장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이게 이 영화의 정체를 가장 정확하게 짚은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웰메이드(well-made)란 기술적 완성도와 서사 구조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갖춰진 작품을 의미하는데, <비광>은 그 기준을 충족하면서도 관객을 극장 밖으로 끌어당기는 흡인력에서 한 발 모자랍니다.

손익분기점이 150만 명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지금 극장가 분위기를 보면 도달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한국 영화 산업 전반의 극장 관람객 수가 코로나19 이후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2019년 대비 낮은 수준이라는 점은(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영화가 처한 현실을 설명합니다. 작품성만으로 버티기엔 시장이 그 전처럼 넉넉하지 않습니다.

요약: 기술적 완성도는 충분하지만, 5년의 시간차와 장르 흡인력 부족이 손익분기점 도달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약점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

제가 아이를 학교 앞에서 늦게까지 기다린 날이 있었습니다. 연락이 안 돼서 한 시간 넘게 서 있었는데, 그날 제가 느낀 감정이 뭔지를 영화 속 중구의 얼굴에서 봤습니다. 그건 분노가 아니라 공포였습니다. 아이 하나 지키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됐는지, 그걸 왜 언론과 정치권이 먼저 가져가는지. 50 넘어서 극장에서 이렇게 얻어맞은 건 오랜만이었습니다.

<비광>이 진심을 다한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청소년 자살 및 학교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이 영화는 자극적인 재현보다 그 주변 어른들의 무력함을 더 오래 바라봅니다. 청소년 자살 예방에 관한 사회적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축 중 하나가 주변 어른의 반응이라는 점은 관련 연구들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부분입니다(출처: 보건복지부). 영화는 그 지점을 과잉 없이 건드렸습니다.

서사적 과잉이라는 약점이 있고, 장르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벼랑 끝에 몰린 아이 옆에서 끝까지 버티는 어른의 이야기를 이 계절에 보고 싶다면, 저는 이 영화 말고 딱히 떠오르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세상에 찍혀서 무너지는 걸 가까이서 본 적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 속 언론 장면들이 더 구체적으로 아프게 읽힐 겁니다.

제 총평은 별 다섯 개 중 네 개 반입니다. 나머지 반 개는 5년을 묵힐 게 아니라 더 빨리 꺼내줬으면 좋았겠다는 뜻으로 남겨둡니다.

요약: 약점을 알고도 극장을 권하는 이유는, 이 계절에 이만한 가족 서사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비광은 느와르 영화 맞나요?

A. 홍보 문구에서 느와르를 강조하지만, 실제로 보면 가족 멜로드라마에 훨씬 가깝습니다. 느와르 특유의 숙명적 어둠과 범죄 장르의 긴장감을 기대하고 들어가면 어긋날 수 있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가족이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라고 이해하고 들어가는 쪽이 훨씬 맞습니다.

 

Q. 비광이 창고 영화라는데, 퀄리티에 문제가 있나요?

A. 2021년 촬영 완료 후 5년이 지나 개봉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적 완성도 자체는 낮지 않습니다. 다만 일부 대사와 분위기가 현재 감각과 미세하게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고, 이건 제가 보면서도 느낀 부분입니다. 퀄리티 문제라기보다는 시간차에서 오는 온도 차이입니다.

 

Q. 미쓰백을 안 봤어도 비광을 즐길 수 있나요?

A. 두 영화는 세계관이나 등장인물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이지원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미쓰백' 관람 여부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미쓰백'을 먼저 보신 분이라면 이번 작품의 변화가 더 선명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Q. 아이와 함께 봐도 되나요?

A. 15세 관람가 등급입니다. 청소년 자살과 학교폭력을 소재로 다루는 만큼, 어린 자녀와 함께 보기보다는 중학생 이상의 자녀와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영화입니다. 자극적인 폭력 묘사보다는 감정적 무게감이 큰 작품입니다.

 

결론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비광>은 잘 만든 영화이지만, 가장 잘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이지원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준 단순한 구조의 힘을 키우려다 분산시켰고, 관객이 스스로 읽어낼 여백을 대사로 메워버렸습니다. 류승룡은 제 몫을 다했고, 김시아는 기대 이상이었으며, 하지원은 조금 아깝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영화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0 넘어 두 시간 꼬박 앉아 있는 게 일인데도 발이 안 떨어졌다면, 그건 그 영화가 뭔가를 건드렸다는 뜻입니다. 화려한 액션보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끝까지 버티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올가을 이 영화만 한 선택지는 없습니다. 극장에서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hRqbqbjTUy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