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나홍진 감독 신작 '호프'를 보고 나서 집에 오는 길 내내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됐습니다. 외계인 영화라는 말에 처음엔 좀 망설였는데,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건 SF 액션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를 괴물이라 부르는지를 묻는 영화라는 걸요. 결말까지 본 뒤 뒤늦게 이 영화의 세계관을 다시 뜯어보니 제가 놓쳤던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호프

세계관: 침공이 아니라 사고였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외계인들이 지구를 공격하러 왔다고 전제하게 됩니다. 저도 처음 30분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소가 죽고, 마을에 괴물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쫓겨 다니는 그림이니까요. 그런데 이 전제가 틀렸습니다.

영화의 배경으로 추정되는 1980년대, 외계인들의 고향 행성 게르트에서는 이미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황제 쿠얼의 부인 조르는 아들 칼리를 데리고 황제에게 돌아가던 중 호포항 인근 상기쓰에 불시착합니다. 계획된 지구 침공이 아니라 전쟁 중에 벌어진 불의의 사고였던 것입니다.

이 불시착 과정에서 외계인 일행은 두 그룹으로 흩어집니다. 칼리와 하측민 출신 노동자 바미기르가 한 조, 조르와 군인 마베이오, 시녀 아이보드르가 다른 조로 나뉩니다. 감독이 실제로 촬영하려 했으나 편집된 넷필로그 장면에서 칼리는 겁에 질려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반면, 바미기르는 낯선 지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는 대조적인 모습이 담길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이 혼자 남겨진 칼리는 마을 사람 양배에게 발견됩니다. 양배는 칼리를 감정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돈이 되는 희귀 생물로 봤고, 사냥 뒤 냉동창고에 보관합니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벌어진 최초의 폭력입니다. 인간이 먼저였습니다.

요약: 외계인들의 지구 도착은 처음부터 계획된 침공이 아닌 불시착 사고였으며, 모든 비극의 출발점은 인간이 황제의 아들 칼리를 먼저 살해한 사건이었습니다.

 

믿음: 성경 구절이 왜 영화 속에 있나

영화 후반, 조르가 내뱉는 마지막 대사가 귀에 걸렸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이 문장이 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을 직접 참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대사가 오래 남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faith)'이란, 아직 눈앞에 실현되지 않은 약속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성경 속 노아는 홍수가 오기 전에 방주를 만들었고, 아브라함은 목적지도 모른 채 고향을 떠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근거가 없어도 움직인 사람들입니다(출처: 대한성서공회).

영화 속 조르와 마베이오가 정확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황제 쿠얼의 우주선이 호파항으로 추락하는 장면, 그러니까 누가 봐도 끝났다 싶은 그 순간에 마베이오는 자신의 심장을 꺼내 칼리를 살리겠다고 맹세합니다. 자기 몸을 내어주는 희생적 부활(resurrection)의 구도, 어디선가 많이 본 서사입니다.

저는 솔직히 이 종교적 레퍼런스가 처음엔 좀 불편했습니다. 영화가 영화로 끝나면 될 텐데, 관객한테 설교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곡성에서도 종교적 요소가 있었지만 그땐 공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는데, 호프는 조금 더 전면에 꺼내 든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집에 오는 길에 계속 그 대사가 맴돌았다는 건, 결국 감독이 뭔가는 건드렸다는 뜻이겠죠.

  •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의 이주 — 증거 없이 행동으로 옮긴 믿음의 서사
  • 마베이오의 심장 기증 — 희생적 부활을 현실로 만들려는 믿음의 행동화
  • 나홍진 감독: "믿음은 희망보다 몇 단계 더 전진한 단어"
요약: 조르의 마지막 대사는 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을 직접 참조한 것으로, 영화는 '보이지 않아도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을 외계인들의 마지막 선택으로 그려냅니다.

 

결말분석: 누가 진짜 괴물인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연출은, 관객의 시선을 계속 뒤집는다는 겁니다. 영화 전반부에서 바미기르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괴물입니다. 냄새도 나고, 생김새도 다르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갑니다. 그런데 냉동창고에서 칼리의 시신이 발견되는 순간 — 너무나 작고 연약하게 연출된 그 시신 — 을 보는 순간 제가 좀 찔렸습니다.

영화 속에서 외계인이 먼저 인간을 공격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 인간들은 공포에 질려 총을 먼저 꺼냅니다. 범석이 낙연에게 먼저 총을 쏘고 친구 경석까지 오인 사격해 다치게 하는 장면은, 공포가 인간을 얼마나 공격적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장면입니다. 여기서 인지부조화란 자신의 행동과 믿음 사이의 모순을 뜻하는데, 자신은 피해자라 믿으면서 실제로는 먼저 공격하는 인간의 이중성이 정확히 이에 해당합니다.

양배 캐릭터는 이 영화에서 가장 노골적인 비유입니다. 그는 칼리를 냉정하게 죽이고 냉동고에 넣지만, 눈앞에 나타난 고양이는 살리려고 핸들을 꺾습니다. 그 바람에 성기가 차량에서 떨어집니다. 관객은 이 선택에 분노하지만, 감독은 바로 그 분노를 뒤집어 사용합니다. 외계인 입장에서 인간은 어쩌면 그 고양이보다 조금 더 발달한 현지 생명체 수준이었을 테니까요. 하찮아 보이던 인간들에게 세자를 잃은 외계인들의 분노가 그래서 논리적으로 이해됩니다.

쿠키 영상에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성기가 살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감독은 성기와 마베이오를 서로 대응하는 인물로 설계했습니다. 성기는 짐승 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남고, 마베이오는 공동체를 위해 자기 심장을 내놓습니다. 극단적인 생존 본능과 희생 사이의 대비를 통해 영화는 마지막까지 "어느 쪽이 더 인간다운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

요약: 호프는 인간과 외계인의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끊임없이 뒤집으며, 관객이 스스로 '누가 괴물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게 만드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3부작 구상과 아쉬움 사이

나홍진 감독은 호프를 산부작, 즉 3부작 시리즈로 구상했습니다. 영화는 소해 사체가 발견된 아침에 시작해 해질 무렵에 끝나는데, 후속편이 계속 제작된다면 저녁과 밤을 지나 새벽까지 다루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니 결말에서 느끼는 당혹감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겪어보니,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옆 사람이 "이게 뭐야"라고 중얼거리더군요. 저도 처음엔 그 심정이었습니다. 2시간 넘게 몰입시켜 놓고 가장 결정적인 지점에서 끊어버리니, 완결된 서사가 아니라 거대한 예고편을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게 솔직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계속 그 장면들이 떠오르는 겁니다. 칼리의 시신, 마베이오의 심장, 그리고 쿠키 영상의 성기. 이 영화의 당혹스러운 결말이 오히려 영화를 더 오래 붙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전편의 완성도보다 전체 시리즈의 구조적 맥락 안에서 봐야 한다는 것, 이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영화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은 남습니다. '외계인도 피해자다'라는 메시지를 관객이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종교적 코드를 너무 명시적으로 꺼내 드는 후반부가 그 과정을 조금 방해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곡성이 공포 안에 종교적 공포를 자연스럽게 녹였다면, 호프는 그 선이 조금 더 선명하게 그어진 인상이었습니다. 그래도 다음 편이 나오면 또 보러 갈 것 같습니다. 이 감독 영화는 놓치기가 어렵습니다.

요약: 호프는 3부작의 첫 편으로 의도적으로 열린 결말을 택했으며, 그 당혹감이 오히려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호프에서 외계인들이 지구에 온 이유가 뭔가요?

A. 처음부터 지구를 침공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고향 행성 게르트에서 전쟁을 피해 이동하던 중 지구 근처에 불시착한 사고였습니다. 황제의 부인 조르가 아들 칼리와 함께 황제에게 돌아가던 길에 호포항 인근에 추락했고, 이것이 모든 사건의 시작입니다.

 

Q. 호프 결말에서 쿠키 영상 성기는 살아있는 건가요?

A. 네, 쿠키 영상에서 성기가 살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감독은 이를 의도적으로 설계했는데, 외계인 마베이오의 불굴의 생명력과 대응하는 인물로 성기를 배치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증거가 아니다"라는 조르의 대사를 인간 쪽에서 먼저 증명하는 존재가 바로 성기입니다.

 

Q. 호프가 3부작이라는데, 2편은 언제 나오나요?

A. 나홍진 감독이 3부작 시리즈로 구상 중이라고 밝혔지만, 2편의 구체적인 제작 일정은 현재 공식 발표된 바가 없습니다. 1편이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를 다룬다면, 후속편은 저녁과 밤, 새벽으로 이어지는 시간대를 배경으로 할 것이라고 감독이 언급했습니다.

 

Q. 황제 쿠얼이 신이라는 설정, 영화에서 직접 나오나요?

A.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쿠얼을 기독교의 여호와, 즉 신에 해당하는 존재로 상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우주선이 지구에 추락하면서 사망하는 장면은 두 세계의 중심이 동시에 붕괴하는 사건을 상징합니다.

 

결론

오십이 넘은 나이에 영화 보다가 눈물이 날 뻔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호프는 팝콘 먹으면서 보는 영화가 아닙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집중하지 않으면 절반도 못 따라갑니다. 그 대신 따라가고 나면 뭔가 남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외계인과 인간 중 누가 더 폭력적인가, 누구의 슬픔이 더 정당한가,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무엇인가. 나이를 먹을수록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 붙들게 되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다음 편이 나오면, 저는 또 극장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PtzQVUKfI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