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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는 지난 주말 밤, 아내와 거실 소파에서 다시 본 영화입니다. 처음 본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었으니 사십 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그때는 친구들과 극장에 갔고, 표를 사려고 한 시간 넘게 줄을 섰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화면이 훨씬 작은 텔레비전이었는데도 손끝의 움직임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요즘 영화를 볼 때 아이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먼저 봅니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그런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 글에서는 창고에 남겨진 존재와 소년이 나눈 약속, 아이의 눈높이로 찍은 화면의 힘, 그리고 이 작품이 남긴 기록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창고에 숨어 있던 존재

이야기는 부모가 갈라서는 집에서 시작합니다. 소년은 형과 여동생, 그리고 지친 어머니와 함께 삽니다. 집안의 공기는 무겁고, 저녁 식탁의 대화는 길지 않습니다. 어느 밤 소년이 마당 끝 창고에서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영화는 그것이 무엇인지 오래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소년의 표정과 숨소리로 먼저 보여 줍니다. 마당에 남은 발자국과 쓰러진 물건들이 단서가 됩니다.

두 존재가 가까워지는 과정이 이 영화의 절반입니다. 소년은 그 존재에게 말을 가르치고, 이름을 붙여 줍니다. 존재는 소년의 손끝을 따라 행동을 익힙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이 사흘 만에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은 지금 봐도 놀랍습니다. 대화가 아니라 관찰과 모방으로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이 과정을 영화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우리 딸이 네 살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아이는 말보다 손짓으로 하고 싶은 것을 전했습니다. 저는 그 신호를 자주 놓쳤습니다. 화면 속 소년은 놓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지나치는 것을 아이가 먼저 알아보는 장면이 이 영화에는 여러 번 나옵니다. 아내는 그 장면들에서 우리 아이 생각이 났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런 신호를 잊고 산 것이 아쉬웠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이 존재를 알아채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어머니는 처음에 겁을 먹지만, 곧 아이의 편에 섭니다. 이 전환이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한 감동입니다. 큰 사건 없이도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는 장면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아이의 눈높이로 찍은 화면

이 작품의 카메라는 대부분 낮은 자리에 있습니다. 어른의 허리 높이, 또는 그보다 더 아래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어른들의 얼굴은 아래에서 올려다본 각도로 잡힙니다. 그 각도만으로 어른이 조금 무섭고 조금 답답한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존재의 얼굴은 늘 정면 가까이에서 잡힙니다.

음악도 절제되어 있습니다. 감정이 커지는 순간에도 관악이 앞서 나가지 않습니다. 대신 숲소리와 자전거 바퀴 소리가 장면을 채웁니다. 저는 이 점이 요즘 작품과 확실히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요즘 영화는 감정을 소리로 먼저 알려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영화는 관객이 먼저 느끼기를 기다립니다.

특수 효과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투박합니다. 그런데 그 투박함이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존재의 표정이 단순하기 때문에 감정을 읽는 여지가 남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보다 이번에 더 많이 봤습니다. 화면이 정교하지 않아서 눈이 인물에게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오래 남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후반부의 추격 장면이 조금 길게 느껴집니다. 어른들의 등장이 반복되면서 아이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부분에서 흐름이 끊긴다고 봤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십 분이 그 아쉬움을 충분히 덮습니다. 그 장면을 위해 앞의 두 시간이 준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십 년이 지워내지 못한 장면

국내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84년에 국내에서 개봉해 서울 관객 61만 명을 모았습니다. 그해 국내 흥행 1위였습니다. 당시 서울 관객 61만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작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극장 수와 인구를 감안하면 상당한 숫자였습니다. 그해 극장가에서 이만한 외화는 드물었습니다.

해외 평가도 단단합니다. 아카데미에서 네 개 부문을 받았습니다. 흥행과 평가를 함께 얻은 작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진짜 기록은 숫자가 아니라 관객의 기억에 있습니다. 지금도 손끝을 마주 대는 장면 하나로 이 작품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입니다.

제 점수는 다섯 개 중 네 개 반입니다. 후반부의 늘어짐은 감안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세대를 넘어 다시 볼 만합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울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장면이 오래 남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우는 방식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E.T. 는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존재가 서로를 배우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다음 날 아침 딸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배경 음악이 아니라 손끝의 움직임입니다. 다음에는 아이와 함께 다시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