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좀비영화를 30년 가까이 봐온 저도 총 한 발 제대로 안 쏘는 좀비물에서 이렇게 오래 멍하게 앉아있었던 건 처음입니다. 2017년작 Here Alone(국내 개봉 제목: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인류 최후의 생존자들)은 세계 인구 99.9%가 좀비화된 뒤 홀로 숲속에서 버티는 여자 앤의 이야기입니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들려올 리 없는 무전을 켜놓고 기다리는 첫 장면만으로 이 영화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배경: 조용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무서운 이유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란 문명 붕괴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장르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다 끝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장르의 대다수 작품은 붕괴 과정의 스펙터클을 팔지만, Here Alone은 그 반대입니다. 이미 다 무너진 세상에서 남은 한 사람이 아침마다 살아남기 위해 치르는 루틴을 보여줍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확인해 보니, 이 작품은 저예산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The Battery(2012)와 자주 비교됩니다. 두 작품 모두 극소수의 등장인물과 최소한의 액션으로 "생존(survival)"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끌고 갑니다. 생존이란 여기서 총을 잘 쏘는 능력이 아니라, 매일 굶지 않고 들키지 않고 하루를 닫는 것입니다.

Here Alone의 앤은 시골 출신 남편한테 배운 수렵·채집 기술로 버팁니다. 덫을 놓고, 버섯을 채취하고, 겨울이 오면 식량을 구하러 사람이 살던 집으로 침투합니다. 특히 자기 피를 병에 담아 아이 장난감에 묻힌 뒤 철조망에 걸어 좀비들을 유인하는 장면은 제가 본 좀비물 중 가장 소름 돋는 파밍 장면이었습니다. 화약 냄새 하나 없는데 그 장면이 더 무서운 건, 그만큼 그녀가 이미 한계까지 몰려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좀비 장르에서 인체 감염 경로와 면역 반응을 다루는 방식을 감염 서사(infection narrative)라고 부릅니다. Here Alone은 이 감염 서사를 대규모 전파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사고 하나로 압축합니다. 파밍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좀비의 피가 앤의 몸에 튀고, 그 피가 품에 안긴 갓난아이의 입으로 들어갑니다. 아이를 키워본 분들은 알겠지만, 저도 그 장면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아이는 결국 좀비가 되었고, 앤은 직접 숨을 끊어야 했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무게는 거기서 시작됩니다.

  • 극소수 등장인물로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미니멀 생존 서사
  • 총·폭발 없이 일상 루틴으로 공포를 쌓아올리는 연출
  • 감염 서사를 개인의 비극으로 압축한 각본 구조
 

 

생존 묘사: 이 영화가 잘한 것과 아쉬운 것

영화 연구자들은 장르물의 완성도를 평가할 때 장르 관습(genre convention)이라는 개념을 씁니다. 여기서 장르 관습이란 특정 장르 영화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일련의 규칙과 클리셰를 의미합니다. 좀비 영화의 장르 관습은 대략 이렇습니다. 군집 좀비, 거점 확보, 생존자 그룹 내 갈등, 배신과 희생. Here Alone은 이 관습을 의도적으로 비틉니다.

이 영화는 2016년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예산 독립 영화치고 이례적인 성과인데, 심사위원이 아닌 관객이 먼저 선택한 작품이라는 점이 의미 있습니다. 거창한 스펙터클 없이도 사람들이 반응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잘됐다고 느낀 건 좀비의 위협감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이 영화의 좀비들은 느리지만 소리에 민감하고 후각이 살아있습니다. 앤이 진흙을 온몸에 바르는 건 체취 차단을 위한 것이고, 피를 미끼로 쓰는 건 후각 유인 전략입니다. 좀비가 등장하는 신마다 실제 위협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핵 앤 슬래시(hack and slash), 즉 닥치는 대로 베고 쓰러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최대한 피하고 속이는 방식으로 생존이 묘사되는 건 신선했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원제 처리 방식입니다. 저는 이게 단순한 번역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정체성 문제라고 봅니다. 원제 Here Alone은 "이 자리에 혼자 남겨진"이라는 의미로, 앤의 내면과 영화의 전체 정서를 압축하는 이름입니다. 국내 배급사는 이 제목을 버리고 유명 게임 The Last of Us와 혼동되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남의 집 간판을 떼어다 우리 가게에 붙인 꼴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이 제목 때문에 게임을 원작으로 아는 관객이 생겼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원제 그대로였다면 영화의 무게가 두 배였을 겁니다.

 

올리비아 해석: 악역인가, 가장 사람다운 인물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은 크리스의 의붓딸 올리비아입니다. 올리비아를 질투에 눈이 먼 악역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앤의 팔을 묶고 좀비들을 불러들이는 극단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 결과 크리스를 포함한 동행자들이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돌려보면서 든 생각은 달랐습니다. 올리비아는 세상이 무너지고 가족을 모두 잃은 십 대입니다. 의붓아버지 크리스가 유일하게 남은 어른이자 연결고리였을 텐데, 그 크리스마저 앤에게로 기울어지는 걸 목격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반응을 애착 붕괴(attachment disruption)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애착 붕괴란 핵심 보호자를 잃을 것이라는 공포가 인지 기능을 마비시키고 비이성적 행동을 유발하는 심리적 반응을 말합니다.

세상이 정상이었다면 올리비아의 질투는 방 문을 쾅 닫는 것으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안전망이 사라진 세계에서 십대가 느끼는 유기 공포(abandonment fear)는 그 강도가 다릅니다. 유기 공포란 보호자에게 버려질 것이라는 만성적 불안으로, 성인에 비해 아동·청소년에게 훨씬 강하게 작동하는 심리 기제입니다.  극한 상황의 청소년이 보이는 비정형적 행동 반응을 트라우마 반응의 일종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좀비가 무서운 영화는 많습니다. 사람이 무서운 영화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한 걸음 더 가서 "그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다"는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올리비아가 미쳤다고 정리하는 순간 이 영화의 절반을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앤이 그 올리비아를 데리고 숲으로 돌아가는 결말이 이 영화에서 제일 사람답습니다. 비명과 함께 끝나는 이 마지막이 "행복한 거점 꾸리기"로 마무리되는 수많은 좀비물과 이 영화를 가르는 지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Here Alone이 게임 The Last of Us랑 같은 건가요?

A. 전혀 다른 작품입니다. 국내 배급 제목이 혼동을 일으키는데, 원제는 Here Alone이고 게임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2016년 트라이베카 영화제 관객상을 받은 미국 독립 저예산 좀비 영화입니다.

 

Q. 좀비 액션이 거의 없는데 무섭거나 지루하지 않나요?

A. 좀비를 베고 쏘는 장면을 기대하면 분명히 서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좀비들이 등장하는 신 자체는 소리와 체취를 활용한 긴장감이 살아있어서 무섭다는 의견도 있고, 심리 서스펜스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액션이 없기 때문에 좀비 한 마리 한 마리가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습니다.

 

Q. 결말이 해피엔딩인가요?

A. 뻔한 생존자 대동단결 해피엔딩은 아닙니다. 비명과 함께 끝나는 열린 결말이고,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결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Q. 올리비아가 한 행동은 그냥 나쁜 짓 아닌가요?

A. 결과만 보면 명백히 잘못된 행동입니다. 다만 세상이 무너진 상황에서 유일한 보호자마저 잃을 것 같다는 공포, 즉 심리학에서 말하는 유기 공포가 작동한 결과라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단순한 악의로 정리하기엔 그 배경이 너무 인간적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결론

좀비영화 30년 경력에서 이런 영화는 드뭅니다. 거창한 것을 기대하고 켜면 실망할 수 있고, 그 부분은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조용한 밤에 앉아서 생존이라는 단어의 실제 무게를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만큼 정직한 선택도 드뭅니다.

제 경험상 좀비물의 진짜 재미는 얼마나 많은 좀비를 죽이느냐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있습니다. Here Alone은 그 지점을 아주 작은 규모로, 아주 깊이 파고듭니다. 원제가 주는 정서 그대로, 이 영화는 "혼자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78NAd-u_i1U